| 어느 대법관의 전직
육군 법무관을 거쳐 전주지방법원 판사, 대법원 대법관을 지내고 중앙선거관리위장장을 끝으로 33년간 법관으로 지낸 한 분이 지난 2월 은퇴하고 바로 부인이 운영하는 한 야채가게와 편의점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 이 전 고위공직자의 일이 언론에 보도되어서 어떤 이는 “신선한 충격이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왜 그런 공직을 지내신 분이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인 올해 8월말 그분은 국내 유명 법무법인에서 고문 변호사로 일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 일이 또다시 언론에 회자되었다. 그 분은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다. 다음 달부터 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일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무항산 무항심’은 <맹자> 양혜왕 편에 나오는 말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 분은 “맹자의 말 그대로 성인이나 도덕군자가 아니고 일반 백성의 한 사람이니 소득이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위키백과에서 일부인용)
일반적으로 이런 법조계 공직자들은 퇴임하면 변호사 개업을 하거나 로펌에 가서 전관예우를 받으며 은퇴이후의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그가 로펌에 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후배 판사에게 로비를 해야 하는 것이 서로에게 부담을 주고 그동안 청백리로서 생활해온 자신의 가치와 충돌되어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사는 것이 바로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실천한 모습이 어떤 이에게는 감동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현실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6개월이 지나서 그는 왜 다시 로펌을 선택했을까? 그분의 말대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서 즉 돈을 벌기위해서일까? 물론 돈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그의 전 직업은 고도의 논리력, 추리력이 필요하며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하고 그 만큼 권한이 주어진다. 또한 업무수행 중 판단의 실수 즉 시비를 잘못가림으로 인한 결과는 한쪽 편의 인생이나 조직의 존폐 또는 엄청난 재산상의 위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 스트레스도 굉장히 심하다. 이런 가운데서 33년간을 명예롭게 지켜온 그는 그런 역할에 대단히 만족하며 자랑스럽게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야채가게와 편의점을 열었다. 새벽부터 싱싱한 야채를 사와서 진열해 놓았을 것이며 또한 처음으로 고객을 맞이하여 물건을 팔고 계산하는 일은 매우 서투르면서 단순하고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결국 그 일이 고도의 지적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인가. 인권과 절차를 중시하고 양심에 따라 판결함으로써 누구든지 법아래 평등하게 한다는 사명과 가치관을 가졌던 것과 부합되거나 더 좋은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는가. 법관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이 일로 대치하여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일이 자신에게 관심을 끌며 재미있는 일인가. 다른 대안이 있는데 반드시 이 길을 가야만하는 이유가 있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그 분이 다시 로펌에 가게 된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될 것 같다. 그가 능숙하게 발휘하였던 능력과 기술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곳이며 재정적인 만족도 얻고 그동안 쌓아 왔던 관계망을 유지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다. 그러므로 그의 입장에서 제2의 인생을 더욱 보람 있게 사는 길을 선택한 것이리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무엇이든 분수에 넘쳐도 모자라도 문제 아닐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