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white) 전화를 기억하십니까
글쓴이 : 김웅태            작성일 : 2011-05-16

“고객은 소유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였는지 모른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마케팅 관련 구절이다. 이 구절을 커리어 개발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앞으로 일어날 변화나 어떠한 세상에서 살게 될지 예측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겠다.
지금은 초등학생 조차도 주머니 속에 자신 만의 스마트 폰을 넣고 다니는 시대이지만 필자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는 가정 집에 전화를 두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전화기를 보유하는 것은 (정확히는 개인의 전화번호) 집 한 채의 비용일 들었을 뿐만 아니라 만성적인 회선적체로 인해 어지간한 배경이 없이는 전화기를 보유할 꿈조차 갖기 어려웠다. 당시 어렵사리 전화를 두었던 사람이라면 오늘 날의 통신환경과 비교하여 진정으로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화기가 급격히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을 전후로 국산 전자식 및 전전자식 교환기가 개발되면서부터이며 통신 외의 다른 산업도 이 시기를 지나면서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물론 기술의 발전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흐름이었으며, 실상 지식집약적인 발전이 전세계적으로 꽃을 피운 것도 이 시기를 지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기술의 발전과 확산속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인 것이다.

작고한 피터 드러커 교수가 오래 전에 지적하였듯이 현대사회는 지식이 다른 지식과 결합되어 새로운 지식과 작동체계가 만들어지는 사회이다. 이 말은 전통적인 커리어 개발 지원이라는 지식과 정보기술이란 지식이 결합되어 (이미 확산 추세에 들어선) 컴퓨터기반커리어개발지원시스템(Computer Assisted Career Guidance System)이라는 새로운 체계를 탄생시켰다. 즉 전통적으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던 커리어 서비스의 대부분이 기술로 대체된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 인간과 기술과의 경쟁에 대해서 언급하였듯이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정도는 더욱 커질 것이며 커리어 서비스의 영역에서도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작업은 대부분이 컴퓨터 기술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보기술 수준으로 판단해보면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커리어 지원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컴퓨터화 시킬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은 2000년에 국가차원에서 실현시켰음) 실례로 커리어 넷에 탑재되어 있는 CACGS는 비록 학생들을 위한 것이지만 매우 우수한 수준의 CACGS로써 대상을 확장하거나 상업용으로 전환시키더라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지속적으로 커리어 지원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현장에서 바라본 바로는 여성새로일하기센터를 비롯하여 대부분 현장의 실천가들이 수행하는 과업 중 상당 부분이 컴퓨터 기술로 대체될 수 있으며, 이는 현장 상담가의 50% 이상이 잠재적인 실직자 처지이거나 커리어 서비스의 효율성이 크게 개선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할 경우 가장 큰 효익은 장소와 시간의 제약 없이 24/7의 서비스가 표준화되어 제공될 수 있으며, 연상학습(associated learning)을 통하여 서비스 효과성이 배가되는 것이다. 물론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모든 과업을 대체할 수 없듯이 커리어 상담에서도 인간이 기술보다 뛰어난 영역이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사람들 간의 경쟁강도를 필연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2000년 이후로 어느 사이엔가 ‘경쟁’과 ‘성과’가 보편적인 일상용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높은 성과가 강조되고(결과적으로 항상 높은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있지만 직업을 통한 성공 보다는 어느 정도를 만족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며, 대단한 성취에 따른 보상보다는 얼마나 오래 동안 일을 할 수 있느냐가 주된 관심사가 되어 버렸다.
한편으로는 길어진 수명에 대한 준비와 걱정이 초미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이 문제는 이미 십 수년 전부터 거론되기 시작한 이슈이며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베이비 붐 세대의 은퇴시기와 맞물리면서 지난 해부터 요란스러운 움직임들이 나타나지만 대부분이 재정적인 준비에 대해서만 강조가 될 뿐, 보다 본질적인 사회적 역할의 재정립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논의나 준비가 크게 부족하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수명연장이 기회이면서 동시에 위협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복지체계가 미흡하며 연장된 수명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개인들에게는 위협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높다. 오래 전부터 건강수명에 대한 인식이 꾸준히 제고되어 왔지만 이 논의의 핵심에는 사회적 역할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
노년의 3대 이슈는 경제적 안정, 사회적 역할, 심신의 건강 등으로 요약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사회적 역할 또는 정체성의 재정립과 관련이 있다. 경제적 안정과 심신의 건강의 중요성이 결코 작지 않지만 사회적 역할은 나머지 두 이슈에 대해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더욱 중요하다. (사회적 역할이 반드시 유급근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님)

노동시장이 경쟁과 효율을 중시하게 됨에 따라 직무중심 노동시장으로의 전환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으며, 수명연장과 연계되면서 개인이 일생 동안 경험하는 직업(장)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30년경에 은퇴하는 사람이라면 대략 5~8회의 커리어 전환을 경험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통해 정체성을 정립/재정립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각 개인들이 맞이하는 전환의 기회나 횟수는 삶의 긴장감을 더해주고 더욱 빨리 지치게 할 수도 있으므로 커리어 상담자의 역할이 지금보다 크게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다룬 주제는 ‘매우 긴 근로기간 동안 직업만족을 누리며 인간뿐만 아니라 기술에 대해서도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역량과 관심이 높은 영역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것이 커리어 개발의 원칙으로 제시되어 왔지만 오늘날과 같이 극단적인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최적의 매칭이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자신의 가치와 부합하는 영역을 찾아 오래 동안 몰입하는 것(integrity)이 더 효과적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변화하는 환경에의 적응에 가장 필요로 하는 수용, 조절, 적응 등등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담자는 변화하는 일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역량과 관심영역을 확장시키고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직무수행 방법에 대비하고 순조롭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무엇보다도 길어진 삶에 대한 주도성을 끊임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을 위해 상담자 자신의 인식과 경험을 넓히는데 결코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Ph.D., CDF-I, GCDF, Supervi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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